Smart Image Content Research Center
Chung-Ang University
Smart Image Content Research Center
Chung-Ang University
Series Volume 1 Overview
The Institute for Convergence Research in Visual Media has been conducting the Global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Convergence Research Program (Project Title: Affective AI-Based Storytelling and Image Generation for Global Cultural Content) funded by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NRF) from 2025 to 2031.
To systematically compile and disseminate the outcomes of this research, we are preparing the “Emotional AI Global Content Series.”
The first volume, scheduled for publication in 2026, is a collaborative essay collection titled “Emotional AI: Rethinking the Boundaries of Technology, Art, and Humanity.”
Rather than serving as a simple introduction to emotional AI technologies, this volume begins with a fundamental question: “How can humans and AI coexist through emotion as a medium?” From this perspective, it aims to create an interdisciplinary platform for reexamining the relationships between humans, machines, and art.
The columns presented here are prepared as previews and summaries of the full manuscripts to be included in the series. New pieces will be published weekly.
We invite you to follow and engage with the evolving discourse on Emotional AI.
5월 2호. 납득의 속도 - 매끄러운 이미지와 노이즈
한상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교수
사진은 한때 무언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롤랑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사진의 본질로 짚은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사진은 “이것이 존재했다”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성을 통해 다른 이미지들과 구별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문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처럼 읽히게 만드는 데 쓰인다. 사진적 형식은 살아남았지만, 그것이 가리키던 존재의 흔적은 사라졌다. 오늘날 가장 설득력 있는 이미지는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다. 가장 자연스럽게 도착하는 이미지다.
생성형 AI 이미지는 이제 단순한 진위 판별의 문제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이미지는 어떻게 우리의 판단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납득을 확보하는가. 한 번도 촬영된 적 없는 장면이 사진적 문법을 통해 기억처럼 스며들고,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건축 사진의 형식을 빌려 실재처럼 읽힌다. 히토 슈타이얼이 지적했듯, 오늘날 이미지의 권위는 원본의 충실한 재현이 아니라 순환과 유통의 속도에서 온다. 생성형 AI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것은 이미지를 유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통에 최적화된 감각의 형식 자체를 생산한다. 허구가 현실로 오인되는 과정조차 생략한 채, 처음부터 '그럴듯한 것'으로 도착한다. 그리고 그 도착은 언제나 매끄럽다. 저항 없이, 마찰 없이, 멈춤 없이.
그런데 현실은 원래 매끄럽지 않다. 현실에는 늘 미세한 불균형과 우연, 정리되지 않은 잔여가 남는다. 노이즈는 그런 잔여가 기술적 이미지 안에서 감지되는 한 방식이다. 노이즈는 보통 제거해야 할 오류로 취급되지만, 그것은 노이즈를 기술의 언어로만 읽을 때의 이야기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노이즈는 이미지가 세계와 마찰하고 있다는 증거다. 형광등 아래 사람의 얼굴은 고르지 않고, 오래된 사진 속 배경은 약간 흔들려 있으며, 실제 도시의 거리에는 불필요한 것들이 가득하다.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이것은 진짜 세계'라는 신호다. 불완전함이 현실성의 징표가 되는 역설이다.
생성형 AI의 이미지는 이 역설 바깥에 있다. 조명은 어디서나 균일하고, 질감은 지나치게 정교하며, 공간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되어 있다. 한병철은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이 매끈함의 논리를 날카롭게 짚은 바 있다. 매끈한 표면은 저항을 제거한다. 마찰이 없는 곳에서는 멈춤도 없고, 멈춤이 없는 곳에서는 질문도 없다. 생성형 AI 이미지의 설득력은 정교한 재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저항의 소거에서 온다. 이미지가 너무 빨리 닫혀버릴 때, 시선은 그 표면 위를 미끄러질 뿐 결코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더 깊은 문제가 있다. 이 매끄러움은 중립적이지 않다. 케이트 크로포드가 지적했듯, AI 시스템은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 분류 체계와 권력의 배치를 내장한 채 작동한다. 생성형 AI가 만들어내는 평균적 얼굴, 안정적인 공간, 설명 없이도 중심이 되는 장면은 기술의 순수한 산물이 아니라 이미 사회가 시각적으로 승인해온 규범의 반복이다. 무엇이 '보기 좋은' 것인지, 무엇이 '맞는 그림'처럼 받아들여지는지의 기준이 감각의 층위에서 조용히 재생산된다. 편향은 오류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더 자주, 더 부드럽게, 더 매혹적인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노이즈는 단순한 결함이 아니라 하나의 인식론적 사건이다. 바르트가 사진에서 '푼크툼'이라 불렀던 것—계획되지 않았으나 보는 사람을 찌르는 세부—은 어떤 의미에서 노이즈와 닮아 있다. 그것은 전체를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시선을 붙잡아 그 자리에 머물게 만든다. 손의 구조적 이상함, 글자의 미세한 파열같은 가시적 오류만이 아니다. 지나치게 완벽해서 오히려 세트장처럼 느껴지는 장면,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한데 그래서 더 낯선 얼굴—이것들도 노이즈다. 납득이 완료되기 직전에 무언가가 걸리는 감각, 그 미세한 저항이 사유의 시간을 만든다. 노이즈는 이미지가 너무 빨리 끝나버리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균열이다.
결국 생성형 AI가 바꾸는 것은 이미지의 제작 방식만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판단의 속도가 바뀌고 있다. 더 정교한 판별 기술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내가 어디서 이미 안심했는지를 되묻는 감각이다. 가장 비판적인 눈이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눈이 아니라, 너무 빨리 납득하지 않는 눈이다.
조금 늦게 믿는 것. 그 작은 지연 속에서 이미지는 정보가 아니라 사건이 된다. 지금 필요한 비판은 거짓을 더 빨리 식별하는 기술만이 아니라, 납득이 너무 빨리 완결되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감각이다. 노이즈는 바로 그 감각이 시작되는 자리다.
5월 1호. 감정의 조각 -AI 시대의 애니메이션 창작
김탁훈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교수
AI가 이미지를 그리고, 장면을 구성하고, 영상을 만드는 시대가 도래했다. Midjourney, Stable Diffusion, Sora와 같은 도구들은 불과 몇 년 만에 전문 창작자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시각적 표현을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변화 앞에서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은 새로운 질문과 마주한다. 표현의 기술이 더 이상 창작자만의 것이 아닌 시대에,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은 무엇을 만들어야 하고, 왜 만들어야 하는가.
AI 시대의 창작 전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봐야 한다.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얼마나 잘 만드는가'의 문제를 '무엇을 제시하는가'의 문제로 전환 시켰듯이, AI는 다시 한번 창작의 무게중심을 이동시키고 있다. 솔 르윗이 아이디어를 설계하고 타인이 실행하도록 한 개념미술의 방법론은 오늘날 인간이 감정과 컨셉을 설계하고 AI가 이를 시각화하는 공동 창작 구조와 구조적으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고퀄리티 이미지를 생성하는 기술이 누구에게나 열린 이상, 창작의 가치는 결과물의 완성도가 아니라 그 결과물이 전달하는 컨셉과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그 창작의 중심에 있는 개념은 '감정의 조각(emotional fragment)'이다. 낯선 공간에서 느끼는 불안, 관계 속의 미묘한 거리감,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미세한 감정의 단위들이 거대한 서사에 앞서 존재하며, 바로 그것이 창작의 진정한 출발점이 된다. 신카이 마코토의 「초속 5센티미터」가 사건의 논리가 아닌 그리움과 거리감의 반복으로 구성되듯, 진정한 서사는 사건이 아니라 감정에서 시작된다. 사건은 감정을 담는 넓은 운동장이 되고 여러개의 감정들이 같이 사건에 따라 같이 병렬적으로 배치 된다.
인간 창작자의 대체 불가능한 역할도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신체표지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에서 말하듯 이성만으로는 의사결정을 할 수 없듯이, 인간의 감정 경험과 표현이 단순한 데이터 패턴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AI는 수백만 개의 이미지를 학습해 확률적으로 그럴듯한 결과를 생성하지만, 그것은 평균화된 패턴의 재현이다. 반면 창작자의 경험은 평균화되지 않는다. 비가 내리던 날 아침 어느 버스 정류장에서 느꼈던 특정한 외로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오후의 공허함, 또한 어릴 때 친한 친구가 전학을 떠났을 때의 상실감—이런 감각들은 살아있는 몸만이 기억한다. 이 살아있는 경험의 축적이 곧 인간 창작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의 데이터셋'이다.
감정이 서사를 만드는 방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이사오 타카하타의 「반딧불의 묘」처럼 실제 경험에서 추출한 감정을 서사의 중심에 놓는 방식이 있고, 「진격의 거인」처럼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설계하되 그 안에 현실적인 감정을 배치하는 방식이 있다. 두 방식은 출발점이 다르지만, 감정에서 시작해 서사로 확장된다는 구조는 같다.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이 감정 자체를 캐릭터로 형상화하며 보여주듯, 감정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오늘날의 콘텐츠 환경은 이미 이 감정 단위 구조를 향해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러브, 데스 + 로봇」의 옴니버스 형식, 「스파이더버스」 시리즈가 스타일 자체를 감정의 언어로 활용하는 방식, 틱톡과 숏폼 콘텐츠의 폭발적 성장—이 모두는 창작이 더 이상 긴 서사 중심이 아니라 감정 단위로 분해되고 재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감정을 설계하고 표현하는 능력은 선택이 아니라 시대적 요청이 되었다.
AI 시대의 애니메이션 창작자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감정의 흐름을 설계하는 스토리텔러다. AI가 표현을 담당하는 시대에, 창작자는 제작자에서 디렉터이자 큐레이터로 이동한다. 무엇을 시각화할지를 결정하는 것, 수백 개의 AI 생성 결과물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감정에 가장 가까운 것을 선택하는 것—그 판단의 기준은 오직 살아있는 경험과 감수성에서 나온다.
기술이 창작의 문턱을 낮추는 시대일수록, 무엇을 왜 만드는지에 대한 감각이 더욱 중요해진다. 더 많이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더 깊이 느끼고 더 섬세하게 발견하는 사람이 앞으로의 창작자가 될 것이다. AI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의 창작자가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정립할 수 있는지 우리는 다시 정의해야 한다.